오늘 소개시켜 드릴 그림은 국보 제 239호 송시열 초상입니다. 송시열은 본관이 충남 논산 은진이고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우재, 화양동주이며 시호는 문정으로,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초상화는 우암 송시열이 심의를 입고, 복건을 쓴 모습을 반신상으로 그렸습니다.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송시열의 다른 초상화에 비해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얼굴과 수염은 최대한 자세하게 그리되 몸체는 간결하고 담백하게 그렸습니다. 그럼으로써 초상화의 주인공을 더욱 부각시켰으며, 대유학자인 송시열을 생생하게 재현해 낼 수 있었습니다.
유학자의 상징, 심의와 복건
조선시대 초중기 초상화 양식을 대표하는 공신초상화는 짙은 색 단령에 화려한 흉배와 카펫이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주인공의 지위와 명예를 드러냈습니다. 반면,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유학자들의 초상화는 간결한 구성과 채색이 거의 배제된 흑백으로 그려졌습니다.
이는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숭상했던 유학자의 모습을 그들이 평상복으로 입었던 심의와 복건 차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같은 양식의 초상화 중에서 송시열의 초상화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는데 송시열을 숭모하고 계승하려 했던 후손과 후학에 의해 많은 수량이 그려졌고, 유사한 양식의 유학자 초상화가 널리 유행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송시열이 스스로 경계하는 글과 정조의 글
상화에는 송시열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찬과 정조가 송시열을 칭송하는 글이 적혀 있어 더욱 흥미롭습니다. 화면 오른쪽에 쓰인 자찬은 1651년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것으로 이때를 초상화가 제작된 시기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림에 표현된 모습이 연로해 보여 초상화가 그려졌을 당시에 쓴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고, 정조의 어제가 쓰인 1778년에 그려진 이모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상단의 표제만으로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이 글들이 초상화의 품격을 더욱더 높여 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의 유행
송시열 초상화는 그의 생전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적극적으로 이모모사되기도 하고 새로운 그림으로 재구성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송시열의 초상화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만 4점, 국립청주박물관 기탁품인 8점을 비롯해 충북 제천의 황강영당 소장본, 삼성미술관 Leeum 소장본 등 많은 수량이 전합니다. 이처럼 한 인물의 초상화가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많은 수량 그려진 예는 조선시대에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실 초상화를 제작하여 영당을 건립해 봉하고 제사 드리는 것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본다면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상례와 제례에 초상화를 이용했던 불교와는 달리 성리학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금지하고, 신주, 신위를 제의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리학자들이 조상 숭배를 위해 초상화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관습으로 정착되었고, 초상화를 또 다른 신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허목, 박세당, 윤증, 남구만 등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남겼고, 후손이나 후학들은 이모본을 여러 벌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영당을 세우고 제례에 초상화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송시열 초상과 제작의 유행에 대해 알려드렸는데, 다음에는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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