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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선승, 염거를 기리는 탑과 기록

by dreamlove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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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염거화상탑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염거화상탑은 지대석과 하대석 일부를 잃어 밑부분 마감이 허전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의 조각 솜씨와 전체 조형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탑 기단부는 밑에서부터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대석 8면에는 사자가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고, 중대석 각 면에는 안상과 안상 내부에 향로와 꽃무늬 등을 돋을새김하였습니다. 상대석에는 위를 향하여 핀 아름다운 연꽃잎이 이중으로 탑신부를 받치고 있습니다. 기단부 위로 올라오면, 탑신받침 위에 팔각 탑신이 놓여 있습니다. 탑신에는 목조 건물처럼 기왓골과 서까래가 표현된 지붕과 처마, 앞뒤 문과 자물쇠, 기둥과 상인방, 창방 등 각 부재 표현과 더불어, 비천과 사천왕 부조상 등으로 장엄되었습니다. 부조 조각들은 뛰어난 조각 솜씨도 놀랍지만 승탑의 조형이념을 말해 주는 상징성을 간직하고 있어 우리의 시선을 더욱 잡아끕니다.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이후 제석, 범천도 등장)상은 통일신라 9세기 중반부터 고려 전기 11세기 초인, 승탑에서 뛰어난 예술성이 발휘되던 시기에 주로 등장하는 부조상이라 승탑의 시대를 말할 때 하나의 기준으로도 삼을 수 있습니다.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는 염거화상의 스승인 도의선사의 탑이 있습니다. 도의선사는 중국에서 처음 선종을 배워 와 통일신라에 뿌리내리게 한 우리나라 선종의 초조입니다. 821년(헌덕왕 13)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경주에서 선법을 펼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 머물며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받아 선문이 번창하였습니다. 

 

그의 선맥은 2대 제자인 염거화상에게 전해졌습니다. 진전사 도의선사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승탑으로 생각됩니다. 승려의 탑을 처음 만들면서 통일신라 석공들은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부처의 탑인 불탑과는 달라야 했기에 기단은 석탑처럼 2층으로 만들면서, 그 위 탑신부는 석등 모양을 빌려 팔각 건물 형태로 세웠습니다. 이처럼 승탑의 초기 형태는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내려는 작가의 고민을 통해 새롭게 창안되었습니다. 이후 2대조사인 염거화상의 탑을 만들 때는 사각 탑 기단부 대신 불상의 팔각 대좌를 선택하여 탑신의 팔각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고, 부처와 불법을 호위하는 사천왕상을 탑신에 새겨 승려를 부처와 같이 받들고자 한 당대의 신앙심을 반영하였습니다. 사천왕이나 사자 부조상은 부처와 관련된 곳에만 사용하던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승려의 탑에 사용했다는 것은 승려를 부처와 같이 섬겼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승려를 부처와 같이 받들다

 

승탑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으로 조성된 것이지만 이곳에 잠든 승려가 곧 부처님이라는 조형 이념으로 세워진 기념물입니다. 탑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이를 말해주고 있지만, 부처님을 호위하는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상을 승탑에 조각한 것도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은 불탑이나 사리기에 새겨진 사천왕과는 달리 왕의 무덤 호석에 새겨지는 12지신상과 같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무장한 갑옷 안에 입은 포의 넓은 소맷자락이 팔뚝을 감싸며 내려오고, 끝이 말린 소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표현은 능묘 12지신상에서 주로 보입니다. 

탑이나 사리기 사천왕상의 경우는 넓은 소맷자락 표현된 예가 하나도 없습니다. 염거화상탑의 서방 광목천상과 경주 능지탑 유상은 특히 더 비슷하며, 이러한 소매 표현은 경주 창림사 터 삼층석탑 팔부중에서도 보입니다. 창림사 터 팔부중상은 855년 문성왕(재위 839~857)이 발원한 무구정탑 팔부중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855년, 국립경주박물관(1938년 입수품)

 

이처럼 염거화상탑은 사천왕 부조상이 새겨진 첫 번째 승탑으로, 능지탑 등 경주 왕릉 12지신상과 자세나 조각 솜씨가 유사하여, 왕릉 석물을 만들던 국공이 만든 승탑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승탑과 함께 세우는 탑비의 경우 당시 왕의 허락이 있어야 세울 수 있었으며 왕이 지정한 문사가 비문을 지었던 것으로 볼 때, 승탑 제작에도 국공이 참여하여 이처럼 뛰어난 조형미를 이룩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승탑과 탑비가 국공이 만든 것임을 탑비의 비문에 기록으로도 남기는데,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탑(고려 977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렇듯 염거화상탑 제작에 국공이 참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조각 표현에서만이 아닙니다. 염거화상탑에서 나온 탑지에서도 왕과 관련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문성왕이 발원한 탑지

 

일제강점기인 1911년경 일본인 골동상인 곤도 사고로는 원주 흥법사 터에 있던 염거화상탑을 서울로 가져옵니다. 탑을 옮기면서 탑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데라우치 조선총독이 염거화상탑을 구입하여 탑골공원에 두었다가, 1930년대에 공원을 정비하면서 조선총독부박물관 뜰로 옮겨 오게 됩니다. 이전을 앞두고 박물관 관계자였던 오가와 게이치는 지대석과 하대석이 없는 게 아쉬워 염거화상탑을 운반한 관계자에게 문의를 합니다. 그에게서 탑을 옮길 당시 지대석과 하대석이 너무 커서 운반하기 어려워 두고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오다와는 1929년 3월 18일부터 29일까지 원주 흥법사 터를 조사합니다. 

 

두고 온 부재는 결국 찾지 못했지만, 출장보고서에 당시 상황을 남겼습니다. 염거화상탑지에는 48자의 쌍구체 글자가 조금 기법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조금기법은 금속 표면에 정이나 끌로 두드려 음각으로 글자를 새기는 기법입니다. 품위 있는 쌍구체로 조각된 탑지는 염거화상탑의 제작 시기와 조형미의 비밀을 말해 주는 단서를 품고 있습니다. 통일신라 선승, 염거를 기리는 탑과 기록에 대해 알려드렸습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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